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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 관념론, 불가지론 등 근대 서양철학의 미망

by SacredCrow 2020.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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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만 빼먹은 서양 근대 철학


 유물론과 관념론,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이 두가지 개념 사이에서 배회하게 만드는 서양 철학의 심각성을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두 집단과 불가지론자 집단은 모두 가장 핵심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레닌은 『유론론과 경험비판론』에서 흄과 칸트의 불가지론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하론』에서 철학자들을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고 있다. 


유물론자는 자연이 제1차적이고 정신이 제2차적인 것이라고 보지만, 관념론자는 그 반대로 본다는 점에서 양자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엥겔스는 이 양자의 중간에 세계의 인식 또는 적어도 그 완전한 인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으로서 흄과 칸트의 지지자들을 세우고 그들을 가리켜 불가지론자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의 지각은 우리의 유일한 대상이다.-흄 『인생론』


엥겔스는 그가 흄과 칸트를 모두 반박하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고도 명쾌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흄에게는 '불가인식적인 물자체'란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 두 철학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현상'을 '현상하는 것'과 '감각'을 '감각되어진 것'과 '우리에게 느껴지는 물(物)'을 '물 자체'와 원리적으로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경우 흄은 '물 자체'에 대한 사유를 철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형이상학'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칸트는 '물 자체'와 존재를 승인하되 이를 '불가인식적인 것', 현상과 원리적으로 구별되는 것, 다시 말해서 원리적으로 지식의 영역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신앙으로 느껴져 제시되는 '피안'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유물론도 관념론도 모두다 진실의 편린이다. 유물론은 존재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 진실이고 관념론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진실이다. 둘다 그것이 의미 있는 영역이 각자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이 말하는 근대 이후 이러한 편협한 사유에 의해서 편협하게 한쪽의 측면에서 세계를 바라보려고 하는 무지한 역사가 이어져 왔다. 



레닌

레닌은 또, 이렇게 말했다.


유물론은 '물질 그 자체' 또는 정신 외부의 물질을 승인하고, 관념 또는 감각을 이들 물질의 투사 내지는 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다. 반면 관념론은 물질은 '정신의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물질은 '감각의 조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우리는 철학을 하는 게 아니라 철학 분류학을 하는 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철학의 목적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머리에 든 잡동사니들로 지적 허영에 빠지기 쉽다. 이들은 가장 핵심인 '합일의식'을 경험하지 못했다. 


따라서 '합일의식'으로부터 오는 정보의 기준점을 발견하지 못해 스스로 배회하는 가설들을 세워 각자 도생으로 여정을 떠난 것이라 볼 수 있다. 불교식 표현대로 말한다면 중생성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합일의식은 그것이 '물 자체'이든 '이데아'이든 모두에게 관통해 있다. 현상계든 물질계이든 이데아든 정신이든 모든 것의 공통분모로 존재하여 통섭을 이루는 근원의 내용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그것은 말로써 다 기술할 수도 없고 사변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우주이고 무엇이 물질인지를 통찰할 수 있는 기본 뼈대 얻을 수 있다. 


노자


그러나, 흄이 바로 이 '물 자체' 영역을 철학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초월성에 대해서 인식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종교문제에 관한 관점을 정리하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종교의 맹목성은 철학적 사변으로 톱아볼 수 없는 영역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서양철학자들에게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유물론이 대두된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최고로 합일의식을 깨우친 서양인은 올더스 헉슬리다. 『멋진 신세계』로 유명한 헉슬리는 『영원의 철학』이라는 저서에서 이 합일의식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객관화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동서양의 고전과 성직자들의 기록에서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었고 그 작업의 결과를 책으로 남긴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


칸트 역시 이 합일의식의 영역을 다루지 못했으나 칸트는 이 영역을 인간이 말할 수 없으나 어찌되었든 존재한다는 불가지론으로 남겨놓았다. 그러나 바로 이 영역을 칸트가 체험했더라면, 아니 칸트 뿐만 아니라 모든 서양철학자들이 체험했더라면 근대 철학사의 역사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유물론이나 관념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중생의 번뇌의 흔적에 지나지 않게 때문이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의 서양 철학은 복잡한 사변의 늪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베르그송, 들뢰즈, 푸코, 지젝 등 감각이나 심리학으로 넘어가면서 진리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밖에서 창만 닦고 있다. 


그들의 뒤엉켜버린 듯한 미친 사변을 들으며 많은 사람들은 철학을 하는 게 아니라 철학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매우 난해하고 그들만의 특권적 영역인 것이라 잘못 오인해, 철학이란 것에 대한 오해를 재 확인하는 경험이 바로 철학이 되어버리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합일 의식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철학으로 완성되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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