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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철학, 영혼, 생명

몸과 나

by SacredCrow 202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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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몸의 간처럼 해독하지도 위장처럼 소화하려 하지도 발처럼 앞으로 내딛는 일이라든지 페처럼 산소를 받아들여 피에 공급 한다든지 심장처럼 펌프질이나 눈처럼 뭔가는 보고 빛의 자극을 수집하여 이해할 수 있는 정보로 꾸미는 일에도 목적을 둔 적이 없다. 


이렇게 내 몸의 주요 부분은 내겐 낯설고 나와 같은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본분에만 충실하다. 사실 그들은 충실하지도 않다. 그저 생겨먹은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이 작동하여 공동으로 조성한 생명 활동의 지속 위에 얹혀져 있다. 

‘내 몸에 국한된 나’는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간 적이 없으며 그런 목적을 달성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없고 단지 생명의 지속 그 자체에서 이미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육체는 영혼을 끌어당기는 중력이 있다. 생명의 지속이 가능한한 그 중력은 지속된다. 생명은 어쩌면 중력의 한 형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런 생명이 흐르는 통나무와 같은 존재이기만 한 것인가? 나는 생명이 지속되는 육체에 자석처럼 붙어버린 영체이기만 한 것인가?


이 질문은 그렇지 않다는 걸 가정하고 있다. 생명과 영혼이 접목된 관계라는 설정은 생명의 완성에 관한 설명에서만 요긴할 뿐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차가 완성되는 과정만 보고 그 차의 성능과 실제 주행모습을 알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나는 육체와 영혼의 접목이 완성한 단계를 지난 존재이므로, 생명이라는 변곡점을 이미 넘은 상태라 할 수 있고 이 영혼이 생명과 닿아 있는 동안에 할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성된 자동차가 달리는 것에 대해서 전념해야 하듯이.

왜 그래야 하는가? 

정체된 상태. 그저 생명이 흐르는 통나무같은 상태로만 인간을 이해한다면 존재에 관한 나의 편협한 오해를 가중시켜서 나를 더 심각한 미망속에 던져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간이 해독하고 위가 소화하듯이 간이 나름대로 자신의 소임을 위해 완성된 존재이듯이 ... 

간과 위 등이 모여 생명을 이루고 이 생명에 접목되어 완성된 인간인 나는 나대로 생겨먹은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당위성의 문제가 내겐 늘 걸린다. 내가 뭘 해야 한다는 당위는 당위적 결론 위에서만 그럴싸하다. 허무하고 의미없고 무모하다. 그것은 어떤 수사에 불과한 것이지 나에게 동기를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살인마라고 가정해보자. 기자가 내게 와서 왜 죽였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사람을 죽여야 할 이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죽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선 안된다. 너는 내가 왜 죽였는 지를 말한다면 그 이유를 이해하고 죽일만 했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러한 너의 생각은 과연 진실인가? 너 또한 어떤 당위에 스스로 얽어매고 있는 건 아닌가? 거짓을 진실로 여기는 수없이 많은 나날의 미망을 연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람을 죽이는 건 죽이는 자로 생겨먹었을 때, 그것이 사는 이유일 때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살인은 상대를 죽일 이유에 의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여놓은 상태에서 죽이는 것이다. 만일 이유에 의해서 죽인다면 그 살인은 완벽하지 않다. 지저분한 파괴와 자기 멸시로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나의 살인은 나의 존재 그 자체이고 삶을 가능케 한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생겨먹은 대로 사는 삶을 설명하기 위한 가정이다.


목적을 찾거나 당위를 구하는 것은 내겐 거부감이 든다. 이는 어떤 권력을 설정하고 굴종하는 수법이다. 목적은 찾거나 당위를 구하는 건 미친 개가 순간의 만족에 이끌려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런 노예로 살고 싶지도 않고 그것이 옳은 길이라는 생각도 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생겨먹은 걸 이해할 필요가 있고 생겨먹은대로 살아야 한다. 생겨먹은 대로 살더라도 입에 풀칠은 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이 있지 않겠나? 하늘과  인간답게 사는 방법도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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