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와 객체
인과는 인과의 주체를 특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전체는 인과의 주체를 특정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따라서 인과는 개체라는 주체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인과는 개체라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인과는 모든 선행한 인과의 결과이며 영원히 재생산되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개체는 인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또 인과는 개체를 전체로 되돌릴 수 없도록 개체를 지속시킨다.
인과는 개체의 자기 형상 유지를 위한 운동이다. 개체는 인과의 주체이며 인과의 원인이다. 개체의 존재 원리는 인과라 할 수 있다.
육체는 전체로 귀속되는 가? 육체가 죽으면 모든 분자가 결국에는 지구의 자연속으로 분산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산은 개체가 전체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수억개의 분자가 각기 다른 곳으로 간들 그것은 수억개의 개체성에 머물러 있다.
더우기 전체는 모든 인과의 총합이며 인과의 종료라 할 수 있다. 인과의 객체성이라는 것은 인과의 동적 상황을 초례하는 개별 주체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분자가 전체라고 가정한다면 분자에게는 더이상의 인과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분자조차도 인과의 흐름 속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육체는 죽어 흩어진다 해도 결코 전체라는 것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어떤 주체라 할 수 있다. 이 주체는 인과의 흐름 위에 놓여 있다. 인과의 흐름은 영혼을 이어가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인과의 흐름은 지속된다. 따라서 영혼은 전체의 완전한 무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분산은 될 수 있다. 일부 분산된 영혼 조각은 각기 인과를 안고 작용하여 어떤 조화에 의해서 또다른 제 3의 인과를 만들어 내어 새로운 개체성을 이어갈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영혼도 육체와 같이 흩어진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여하간 그렇다면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의 근거는 무엇인가? 엔트로피를 무로 향하는 사랑의 여정이라고 가정해본다면, 성장은 사랑의 인과를 만드는 것이다. 사랑의 인과는 어째서 무로 향하는 가? 사랑의 사랑의 사랑의 사랑으로 이어지면 사랑의 다차원으로 상승하는 것일까?
이 무한한 사랑이야말로 생명과 만물을 낳기 위해서 분주한 우주의 본질이다. 사랑은 창조의 원인이다. 심지어 인과라는 것까지도 창조해내고 있다.
이러한 사랑의 인과를 창조한다는 것이 우주의 본질이며 우리 영혼이 행하는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성장이라는 것은 이 무한한 사랑의 인과가 서로 겹쳐지는 속에서 영원한 빛의 근원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영원한 빛의 근원은 무한한 사랑의 다차원이 비롯된 곳이 아닐까?
영혼이 다차원의 사랑을 더 많이 깨우쳐가면서 점점 더 빛의 근원과 라디오 주파수처럼 감응하게 되고 자석처럼 서로 가까워지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성장이나 진화라는 것은 영원한 사랑의 빛에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식과 사고능력은 바로 이 사랑의 인과를 알아보고 이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서 발달한 더듬이 같은 것이 아닐까?
영원한 빛의 근원에는 영원한 어둠또한 있을 것이다. 이 둘다 없는, 보다 원초적인 곳은 완전한 무의 경지다. 그러나 완전한 무는 애시당초 의식에 의해서 살아가는 내가 어떤 형태로든 가정해보는 것이 불가능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무(無)라는 것은 모든 유(有)를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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