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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성 넘어의 것을 엿보기
아버지의 경계는 존재(Sein)을 알게하고 모성이 주는 가능태는 정재(Dasein)를 감지하게 하는 것이다. 정재는 이원성을 완결하고 에고는 이로써 견고해지며 패르소나는 조정된다.
이원성의 규칙은 지나치게 순행적이며 진부하게도 틀에 박혀있고 예측이 가능하며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들 이원성의 복합적인 개입으로 세계는 기하급수로 복잡해진다. 이원성의 기본 룰이 중첩되면 서로를 교란하여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이원성의 제한성이 마치 없는 걸로 착각하게 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이는 술어를 보고 주어를 추정하는 문제 봉착하게 한다. 통찰의 좌절은 이런 식으로 훈련된다. 그래서 세계를 미분해볼 필요가 있다. 언어나 삶으로 초점을 좁혀보자.
언어 이면의 무엇. 예측 가능한 순행 이면의 무엇에서 이원성 이전의 세계를 엿볼 수만 있다면 호수에 작은 돌맹이 던지듯 하는 것이 예술이라 가정해볼 수 있다. 역행은 변태의 방법이며 이원성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 변태는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마찬가지로 언어든 삶이든 세계의 순행속에 우리를 격리한다. 그것을 확장한다면 우리의 감각으로 부터 은폐된 존재의 또다른 진실에 다가설수도 있다. 물론 이 진실은 진리라기 보다는 물질의 확장된 감각적 영역을 뜻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무엇이 나올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의미를 뛰어넘고, 삶이 현상계의 필연을 뛰어 넘어 확장된 상황에서 배후의 감각적 불모지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이원성의 소재들 중에는 그 단서가 있다. 그 단서가 바로 메타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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