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역사

헨리키신저의 졸작, '헨리키신저의 중국이야기'

by SacredCrow 2020. 4. 17.
300x250



※이 블로그는 중간중간 보이는 광고 클릭 시 발생하는 소정의 비용으로 운영됩니다.


헨리키신저(Henry Kissinger)의 

『헨리 키신저의 중국이야기』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끔찍한 역사 왜곡서이며 허무맹랑한 소설이다. 

 

 

 

  중국이야기의 대략적인 내용을 최대한 간추리면 "중국은 손자병법의 나라다. 미국은 손자병법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은 자신을 황제국이라 칭하고 싶어 한다. 중국은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다. 미국은 중국과 싸우기만 할 게 아니라 함께 친하게 지낼 방법도 있을 것이다" 정도로 간추릴 수 있다. 

 

 

 

 

 

 

키신저의 이 저서는 한민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데 주로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많이 강조된다.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의 이야기와 연관시켜 아주 고약한 거짓말을 써 놓았다. 

 

 

① "일본도 중국처럼 천황국가이고 일본은 중국의 조공체제에 들어가지 않았다"

② ˝류큐와 한반도 국가들의 일본 조공체제˝ 

   (조선이 일본에 조공했다는 주장)

 

 

 

이 두 줄만 보아도 키신저는 동북아 역사에 무지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번은 사실이 아니다. 일본도 중국에 조공하려도 애써왔다. 

 

헨리키신저 , 중국이야기 ( 걸출한 중국에서 쇠퇴한 중국으로 , 109페이지)

 

 

우리가 잘 아는 양나라나 

당나라 등에 대한 왜()의 입조 외에도

일본이 이웃국에 조공한 예는 수없이 많이 있으나 한 개의 예를 들어 본다.

 

 

 

 

 

 

 

선조 27년 왜군의 침략으로 인해 파견한 명나라 관리 홍계준이 임진왜란이 진정되는 휴전협상 국면에서 선조에게 아뢰는 말이다. 

 

 

선조실록 52권, 선조 27년 6월 2일 기유 4번째 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봉공(封貢)에 반대하는 예부 주객 청리사 제독 회동관 주사 홍계준의 주본 내용

 

"저 우둔한 왜노만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바다의 거북이와 물고기 족속 속에 던져버리고 문고(文告) 의 반열에 포함시키지 않아 그 훈계하심이 삼엄했었습니다. 우리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 때에 왜노가 애걸 복걸하여 비로소 봉공(封貢)해주었으나 당시 조공의 시기와 사신의 숫자를 한정시키면서 우리의 방비를 더욱 닦았습니다. 그 후 변Te와 거짓이 갖가지로 나오고 배반과 복종함이 일정치 않아 선덕(宣德) 127) ·정통(正統) 128) 때부터 가정(嘉靖) 129) 말엽까지 내지(內地)를 침략하여 그들이 지나간 곳은 폐허가 되었으므로 강남(江南)에서는 지금도 그들을 호랑이라고 말하니, 대체로 봉공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것입니다."
 
 
는 명나라 관리 홍계준이, 일본이 조선에 대한 조공 하겠다는 요청에 대해 조선 선조가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제언을 하는 상소인데, 내용인즉슨 
 
"명나라는 주변국들과 통교하였으나 오직 왜구만은 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황제는 왜구를 인간의 덕이 미치지 못하는 물고기 족속 수준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왜구가 명나라 황제에게 애절하게 조공을 허가해달라 요청하여 황제가 이를 허락했으나 황제는 왜구의 신의가 없음을 알고 항시 방비를 하도록 명했다. 
왜구는 점차 거짓과 속임수로 왜구 본성을 드러내 행동하더니 급기야 해안 지역 일대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고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일본은 조공을 했다. 키신저가 일본이 조공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이유에는 일본이 자칭 만세일계의 천황을 모셔왔다라고 거짓말 해온 것에 낚인 것이라 볼 수 있다. 
 
만세일계도 거짓말이지만 일본의 천황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쇼군이 지배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황제에게 조공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의 천황은 다른 나라처럼 정치의 실세가 아니라 상징성을 띈 존재에 불과했고 주로 일본 개국신에 대한 제사를 이어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키신저는 이를 정확히 이해 못하고 중국에 황제가 있고 일본에 천황이 있어 마치 동북아에 중일 양국의 양제체제가 이어왔다는 착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키신저의 무지에 의한 공상에 가까운 도식에 따르면 조선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늘 갈팡질팡하는 비루한 민족이 되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며 멍청한 유태인 키신저의 무지에서 발생한 환타지 소설에 불과하다. 
 

 


또, 키신저의 조공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대부분의 조공은 제후국이 상국에 행하는 어떤 굴욕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그런 굴욕적으로 공물을 바치는 개념에 부합하는 시기는, 양국이 전쟁을 종식한 직후라든지 하는 극히 드문 경우에 한정되고 대부분의 조공은 양국의 우호를 확인하는 정기적인 교류의 형식이었다. 

300x250

일반적으로 조공은 무역과 통교를 지속하기 위한 양국 간의 노력이었고 아시아의 관례였다. 조공을 하면 조공을 받은 국가는 더 많은 공물을 상대국에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이것을 회사(回謝)라고 한다. 

조공(朝貢)에 대해서 회사(回謝)를 하지 않는 일은 원칙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황제국은 조공에 대해 더 많은 양을 답례로 보내기 때문에 특히 몇 안되는 중국의 한족 정권 중 하나인 한나라는 늘 적자를 보았다. 

 

그래서 청나라 시절에는 답례로 보낼 물자 조달이 부담이 되어 조선에게 조공 좀 그만 보내라고 하던 경우도 있었다 한다. 결국 양국이 서로 주고 받는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한쪽 건 굴욕적인 조공이고 한쪽 건 거들먹 거리는 하사란 말인가? 

 

또, 황제국에 조공을 하고 싶어하는 나라가 거절당해서 전쟁을 일으켜 황제국을 지배하는 경우도 있었다. 테무진 시절의 몽골이 중원의 국가인 금나라와 송나라로부터 통교를 거절당하자 공격하여 멸망시킨 예가 그것이다. 

 

조공은 통교 활동이었던 것이고 이 통교를 거절하면 전쟁이 일어났고 황제국이 무너지곤 했다. 조공은 상국과 하국의 굴욕적인 관계가 아니라, 역으로 황제국조차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행하던 무역 통교 형식이었다. 

 

키신저의 무지는 계속 이어간다. 

 

② 번 류쿠와 한반도 국가의 일본 조공체제라는 것이다. 이 역시 사실이 아니라. 조선은 일본에 조공을 한 적이 없고 오히려 일본의 고대왕국은 백제의 분국 이었으며, 한반도로부터 수많은 문화와 체제를 받아가 비로소 문명국으로 발전해 간 후진국이었다. 

 

고려-조선 시기에 일본은 불교경전과 도자기류를 구걸하기 바빴다. 그리고 류쿠(유구국)는 고려와 조선에 조공했다. 

 


고려사 > 卷一百三十七 > 列傳 卷第五十 > 昌王 元年 > 8월 > 유구국 중산왕이 칭신하며 예물을 보내다
유구국 중산왕이 칭신하며 예물을 보내다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옥을 보내어 표문을 바치며 신하를 칭하고, 왜구에게 사로잡인 우리 인구를 돌려보냈으며 방물인 유황 300근, 소목(蘇木) 600근, 후추 300근, 갑(甲) 20부를 바쳤다. 처음에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보고하기를, “유구 국왕이우리나라가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순천부(順天府)에 도달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도당(都堂)에서 전대(前代)에 온 적이 없다 하여 그 접대하는 것을 어려워하였는데, 창왕이 이르기를, “멀리서 사람이 공물을 가지고 왔으니, 박하게 대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서울로 들어오게 하여 위무하여 보내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전 판사(判事) 진의귀(陳義貴)를 영접사(迎接使)로 삼았다.

 

일본은 1607년 이후부터 있어왔던 비 전쟁 방식의 문화 전수 행사였던 조선통신사 방문에 대해서, 일본국 한 해 예산의 수 배에 이르는 예산을 들여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에도 막부는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에 조선통신사는 조공을 바치러 오는 것이고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라고 속였다. 일본 국민에게도 일본이 조선을 거느린 나라처처럼 속여서 국가적 자부심을 고취했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듯이 공물을 바치려 오는 조공 행렬이 쇼군에게로 오는 길에 일본국 한 해 예산의 약 세 배를 들여서 정성을 다해 맞이한다는 건 언어도단이니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통신사는 일본의 쇼군을 만나고 돌아갔지만 일본의 외관은 부산 관아의 관리만 만나고 돌아갈 정도로 격이 낮았음에도, 마치 형식만 보면 조선은 일본 쇼군에게 아뢰기 위해 왔고, 

 

일본은 조선 왕에게 사신을 보내지 않은 것 처럼 되어 버렸으니 이것을 가지고 빡대ga리 일본 극우의 망상에 의한 빛나는 창작의 불쏘시개 가 된 것이다. 1892년 

임태보(하야시 다이스케, はやし たいすけ, 林泰輔)의 조선사(『朝鮮史』)와 1912년 조선통사(『朝鮮通史』), 1938년 발행한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朝鮮史』)에는 이런 기본 아이디어가 녹아 있다. 

 

황당무계한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설이라든지 임나일본부설, 한사군 한반도설, 고구려-백제-가야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라든지 하는 거짓말들이 이 때 만들어 진다. 
일본의 이런 역사 왜곡을 통한 자긍심 고취와 대외 침략 동기 형성은 수백년 묵은 그들의 열등감과 정신승리 습성에서 나온 것이고 연대도 다 틀린 일본서기까지 따지고 보면 천년을 넘어선 고약한 종족 특성이다. 

 

기생, 게이샤들과 야외모임을 가지고 있는 조선총독부 직할 조선사편수회 벌레들

 

필자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키신저의 공상을 확증해 주는 아주 고약한 원인이 있었음을 확인한다. 바로 퉁쑤위라는 자다. 

 

키신저의 한반도 일본 조공설은, 바로 1979년에 중국계 미국인 퉁쑤위(邓嗣禹, Têng Ssu-yü)와 페어뱅크라(John King Fairbank)는 자에 의해서 쓰인 논문을 인용한 것이다. 

Research Guide for China’s Response to the West: A Documentary Survey, 1839–1923'』
Publication: November 1979  Ssu-yü Têng, John King Fairbank

 

중국이야기에서 인용한 퉁쑤위와 페어뱅크의 논문

퉁쑤위의 소개를 보자면 

 

퉁쑤위(邓嗣禹) (1906년 8월 12일 ~ 1988년 4월 5일)
인디애나 대학교의 신학, 역사 교수였다. 중국 후난성 1906년 출생하였고 1988년 4월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에서 차에 치여 사망했다. 중국에서 유교와 현대사등을 공부했다. 1937년 미국에 왔을 때, 그는 미국 중국학의 창시 세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학문을 위한 전문화된 단문과 서적 도구뿐만 아니라 '중국의 서구에 대한 대응'(

China's Response to the West)과 같은 입문 학생들을 위한 광범위한 연구논문도 썼다.


 

Teng은 협업을 통해 20여 권의 책, 50여 편의 저널 기사, 그리고 수많은 셀 수 없는 리뷰를 게재했다.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그는 19세기 중국 내 태평천국의 난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의 출판물은 중국 시험 제도, 유교 가정 규칙, 1842년 난징에서의 중국 외교, 청과 명 시대의 역사학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다양했다. 여기에 그는 중화민국 사전, 일본과 극동에 대한 연구, 그리고 20세기 중국의 비밀 사회 등을 추가로 연구했다. '태평청국의 난과 서구 열강'은 1971년에 출판되었다.

 

이 자는 미국 내에서 오랜동안 중국과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색안경의 렌즈 역할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자의 연구 논문에 있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일본의 조선 역사 왜곡 전문 기구인 조선사 편수회의 소설원작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키신저가 

헨리 키신저의 중국이야기』를 저술하는 데에 있어서 

퉁쑤위의 논문은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거짓말을 확대 재생산하여 거짓말의 유통기한을 더 연장하는 키신저의 엉터리 저작 헨리 키신저의 중국이야기는 서구권과 동양등 전 세계의 수많은 지성인에 의해서 읽혔다.

 

조선총독부 -> 통쑤위 -> 키신저로 이어지는 거짓말의 유통 체인으로 동북아 역사에 대한 거짓말은 또다시 망령처럼 살아났다. 그리고 비슷한 또 다른 인간 예를 들어 제럴드 다이아몬드의『총, 균, 쇠』

라든지 키신저의 최측근인 죠수아 쿠퍼 라모의 망언이라든지 하는 똥들이 계속해서 세상의 비싼 관심을 강도짓하고 있다.

 

 


그렇게 한국에 대한 외국 지성사회의 오해는 더 견고해지고 있는 것이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통해 키신저가 어째서 중국과 일본을 중시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미국이나 이리본의 처분이 따라야만 하는 소국의 입장인 걸로 포지셔닝을 하려고 드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키신저의 인식에는 한국은 그런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허무맹랑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특히 키신저의 최측근 조슈아 라모의 망언은 더 심각하다. ''모든 한국인'은 발전 과정에서 일본이 문화, 기술 그리고 경제적으로 중요한 모델이 됐다'라고 말한 부분은 이자에게 있어서 사실 명제라기보다는 당위명제로 느껴진다.

 

'그렇다'가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인 것이다. 키신저와 이 자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할 생각이 없고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동북아 역사를 바라보는 걸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자들은 중-일 양강 구도로만 전제하여 동북아를 이해하고 있고 또 그러한 도식이 관철되어야만 신들이 구상한 미국의 동북아 정책이 옳은 것이 되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오해가 사실명제에서 당위명제로 굳어진 상태 아니겠는가? 

 

바로 이 당위명제로 이전한 그들의 신앙이 그동안 일본을 거점으로 하는 코리아 패싱으로 실현되어 온 것이다. 


역사에 관한한 키신저는 조선총독부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셈이다. 이 총독부 키드는 일본의 역사 범죄를 계승하고 일본 군국주의자의 한반도관을 그대로 이어받아 미국의 전략으로 적용해온 자다. 이렇듯 역사관이 정치관으로 투영되기 때문에 역사 바로 세우기가 중요하다.

 

헨리 키신저는 한민족의 문명에 관한 지식이 없고 관심조차 없는 게 분명하다. 문제는 이러한 키신저가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의 주요 동북아 전략의 핵심 두뇌역할을 해왔으니 한국인에게 이 시간은 악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의 지성사회는 이런 책을 보며 비판의 목소리조차 내지 않고 오히려 서양인 유명 저자의 명저에 대한 비굴한 칭송에 동참하기 바빴던 것일까? 

 

지난 수년간 나는 키신저의 이 책을 비판하는 자를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간의 한국의 지성을 대표한다는 자들이 신기루 같은 허망하고 저열한 자들이라는 뜻은 아닐까? 

 

2018/05/12 - [역사] - 강경화의 수상한 역사관, 퓰리처상 받은 '총, 균, 쇠'와 강경화, 그리고 반민족 피지배 사관

2018/05/11 - [역사] - 조선의 파저강(婆猪江) 정벌과 명나라의 위기의식

2018/05/11 - [역사] - 고려말 영토 서북 방면에 대하여

2020/02/22 - [역사] - 역사에서 지금의 중국은 없다.

2020/04/09 - [시사/사설] - 앞으로 중국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관한 근본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2020/04/09 - [시사/사설] - 중국 2차 유행병 확산과 황산에 몰려든 인파

2020/04/10 - [시사/사설] - 중국정부에 의해서 묵살되는 표현의 자유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