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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고려말 영토 서북방면에 대하여

by SacredCrow 2018.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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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영토 심양(瀋陽)

 

<태조실록 1권, 총서 48번째기사>태조와 서북면 원수 지용수 등이 동녕부를 공격하다. 8월, 우리 태조와 서북면 원수 지용수(池龍壽)·부원수(副元帥) 양백연(楊伯淵)에게 명하여 가서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게 하였다.

 

->반도사학에서는 동녕부가 평안도부근으로 그리고 있지만 동녕부는 요동이었다. 다음 문장을 보자.

 

<태조실록 1권, 총서 48번째기사>기병[輕騎] 3천 명을 거느리고 요성(遼城)을 습격하게 했는데, 저들은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는 이를 얕보아 싸웠으나, 많은 군사들이 잇달이 이르니 성중(城中) 사람이 바라보고는 간담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 동녕부를 공격하러 간 태조가 요성(遼城)을 공격하고 있다. 요동성(遼東城)은 옛 고구려의 성이다. 지금의 요양시(Liaoyeng)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동녕부는 요양이 위치한 요하 일대, 즉 지금의 요동이다.

 

<태조실록 1권, 총서 48번째기사>원(元)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공주(公主)에게 요동(遼東)·심양(瀋陽)의 땅을 내려 주어 탕목읍(湯沐邑)027) 으로 삼게 하고......<생략>

 

-> 공주는 제국대장공주 (齊國大長公主)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심양을 공주에게 내려주었다는 것은 그녀의 아들 고려 충선왕이 요동의 심양왕에 책봉 됐던 사실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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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1권, 총서 48번째기사>본국의 죄인 기새인첩목아와 결탁하

여 복심(服心)이 되어 무리를 모아 백성들을 침해했으니, 불충(不忠)의 죄는 모면할 수가 없다. 지금 의병(義兵)을 일으켜 문죄(問罪)하는데 새인첩목아 등이 동녕성(東寧城)에 웅거하여 강성함을 믿고 명령을 거역하므로...<생략>

 

->요동, 심양의 두목관이 고려국의 백성을 괴롭혔으며 요양 동녕부에 웅거하고 한다. 특히 심양에 대해서 고려를 본국이라 쓰고 있다. 이는 심양일대가 비록 원나라에 의해서 개입 받아 괴뢰정부 형태로 통치했으나 어디까지나 고려의 영토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원나라 황제가 축출되어 원나라 권력이 사라진 후에 고려는 다시 이 지역에 대한 고려의 완전한 지배력을 다시 회복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요동, 심양 등은 고려 백성이 사는 고려 영토였다.

 

<태조실록 1권, 총서 48번째기사>요동·심양의 두목관(頭目官) 등이 들은 체하지 않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또 본국(本國)에도 예의(禮儀)를 닦지 않고...<생략>..... 요하(遼河) 이동(以東)의 본국 강토내의 백성과 대소(大小) 두목관(頭目官) 등은 속히 와서 조회하여 작록(爵祿)을 함께 누릴 것이며, 만약 조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감계(鑑界)가 동경(東京)에 있을 것이다.

 

->고려 말기, 만주 요하 일대의 동쪽이 고려의 영토임이 분명하게 기정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요동·심양의 두목관(頭目官)에 대해서 속히 항복하고 내조(來朝)하라는 명령으로 최후 통첩을 하고 있다.

 

 

한가지 논리적인 문제가 있다. 요성이라는 성이 요동이 아닌 곳에 있었으리라는 가능성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만일 요성(遼城)이라는 성이 요동성이 아닌 별개의 성으로 평안도에 존재해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허나 만일 그렇다면 동녕부 역적들 처단하러 나선 이성계가 심양과 요동성에 가서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실록은 동녕부 공격->요양,심양 공격이라는 이야기로 전개하고 있다. 이는 요성이 요양의 요동성이라는 뜻이다.

 

이상 태조 이성계의 동녕부 공격은 심양, 요동 지역에서 벌어질 일임이 명백하다. 따라서 동녕부는 요동일대를 말한다. 반도사관에 쩌른 위키백과사전과 일제의 후예들이 말하듯 평안도가 아니었다.

 

위키에서 동녕부 위치를 보면 뒤죽박죽 개판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동녕부 위치를 묘사한 그림은 동녕부가 평안도라고 해놓고 동녕부 정벌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는 고려가 압록강과 파저강(婆猪江)을 건너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가 지키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포위 공격하고 요양을 공격했다고 씌여 있다.

 

사이비 식민 역사학자들이 머리도 나뻐서 일관성도 없고 수습도 못하고 있다. 그림은 동녕부가 평안도에 있어야 하는 걸로 가정한 버전으로 가져다 놓는 일을 저질러 놓고, 동녕부 정벌에 대한 상세 기술에 있어서는 요동에 있는 요양을 공격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니, 이게 미치지 않고서는 누가 이런 앞뒤 다 틀리고 왜곡되고 한심한 글을 통해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것이며 우리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겠는가?

 

설마 저희들 생각에 아전인수식으로 껴맞추느라 요양을 평안도로 비정이라도 했는가?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는 퍼즐의 조각을 끼워맞추거나 논리적 정합성을 해명하지 않고 문제가 있는 상태 그대로 너저분하게 기술해놓고 있을 뿐.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쓰레기들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역사를 어렵게 여기도록 하고 골치 아프고 정떨어지는 것으로 조장하는 게 저들이 표면 아래로 감춘 목적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래서 더 괘씸하다. 위키의 역사 기술 오염은 대단히 심각하다. 이를 언제고 반드시 손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로 사기친 일제의 반도사관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이 반도사관을 수호하는 양Aa치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반도사관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고려 영토를 그릴려면 제대로 알고 그려야 한다. 교과서에서 본 작은 반도에 있는 우리 민족의 고려 영토 그림은 일본 원숭이들의 정신착란에서 비롯된 똥이다. 

역사 영토를 대함에 있어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따위에 매몰되어서도 안되고 조선 초기와 중기 이후 유생들의 극에 달한 사대 사관에 의한 반도사관의 뿌리도 우리는 극복해야 한다. 반도는 우리 역사의 일부에 불과하니까.

 


 


<원문>
〔○〕十二月, 太祖以親兵一千六百人至義州, 造浮橋, 渡鴨綠江, 士卒三日畢濟。 至螺匠塔, 去遼城二日程, 留輜重齎七日糧以行。 使裨將洪仁桂、崔公哲等, 領輕騎三千, 襲遼城, 彼見我師少, 易之與戰, 大軍繼至, 城中望見膽落, 其將處明恃驍勇猶拒戰。 太祖使李原景喩之曰: "殺汝甚易, 但欲活汝收用, 其速降也。" 不從。 原景曰: "汝不知我將之才也。 汝若不降, 則一射洞貫矣。" 猶不降。 太祖故射拂其兜牟, 又使原景喩之, 又不從, 太祖又射其脚, 處明中箭退走。 旣而復來欲戰, 又使原景喩之曰: "汝若不降, 卽射汝面。" 處明遂下馬叩頭而降。 有一人登城呼曰: "我輩聞大軍來, 皆欲投降, 官員勒使拒戰, 若力攻城, 可取也。" 城甚高峻, 矢下如雨, 又雜以木石, 我步兵冒矢石, 薄城急攻, 遂拔之。 賽因帖木兒遁, 虜伯顔, 退師城東。 張牓納哈出、也山不花等處曰:

奇賽因帖木兒, 本國微臣, 昵近天庭, 過蒙殊恩, 位至一品, 義同休戚。 天子蒙塵于外, 義當左右先後, 効死勿去。 爾乃背恩忘義, 竄身東寧府, 挾讎本國, 潛圖不軌。 年前國家, 遣兵追襲, 逃不血刃, 又不赴於行在, 退保東寧城, 與金伯顔平章等, 結爲心腹, 松甫里、法禿河、阿尙介等處, 團結軍馬, 又欲侵害本國, 罪在不原。 故今擧義兵以問, 乃其賽因帖木兒、金伯顔等誘脅小民, 堅壁逆命。 哨馬前鋒, 生擒金伯顔外哈刺波豆、德左不花高達魯花赤、大都摠管等大小頭目, 盡行勦捕, 賽因帖木兒, 又復在逃。 仰賽因帖木兒去接各寨, 卽便捕捉飛報。 如有隱匿不首者, 鑑在東寧。

又牓金、復州等處曰:

本國與堯竝立, 周 武王封箕子于朝鮮, 而賜之履西至于遼河, 世守疆域。 元朝一統, 釐降公主, 遼 瀋地面, 以爲湯邑, 因置分省。 叔季失德, 天子蒙塵于外, 遼 瀋頭目官等, 罔聞不赴, 又不修禮於本國, 卽與本國罪人奇賽因帖木兒, 結爲腹心, 嘯聚虐民, 不忠之罪, 不可逭也。 今擧義兵以問, 賽因帖木兒等據于東寧城, 恃强方命。 哨馬前鋒, 盡行勦捕, 玉石俱焚, 噬臍何及? 凡遼河以東本國疆內之民, 大小頭目官等速自來朝, 共享爵祿。 如有不庭, 鑑在東京。

翌日, 師次城西十里。 是夜, 有赤氣射營, 熾如火, 日官曰: "異氣臨營, 移屯大吉。" 遂班師野宿, 令士卒各作溷廁、馬廐。 納哈出躡後行二日曰: "作廁與廐, 師行整齊, 不可襲也。" 乃還。 時中國人曰: "攻城必取, 未有如高麗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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