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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고려사』,북한도 역시 역사 기술에 '중국'이라는 용어를 남용한다

by SacredCrow 2018.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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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용어의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이 해석해서 옮겼다는 『삼국유사』 해석본 책들을 펼치면 첫 시작 단군 이야기 부분에 '평양'이라는 지명에 대한 주석부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게 흔하다. 다른 삼국유사도 대부분 같은 책을 베낀 책들이다. 평양의 실제 위치도 연구하지도 않고 무조건 현재의 북한의 평양을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형적인 반도사관의 틈바구니에서 나를 격리하고 세뇌하는 역겨운 지적 독극물이었다. 

 

한심하고 어이 없어서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따라서 나는 우리나라서 출판하는 고려시대에 저술한 책의 해석본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우리가 접하는 삼국유사, 삼국사기는 왜놈들이 저희 입맛에 맞게 이미 한번 손 본 책이라는 정보도 있었다. 이러던 차에, 조선 초기에 편찬한 『고려사』를 보려 하였는데 이 역시 우리나라의 것을 신뢰할 수 없어 북한 출판 본을 보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편찬한 『고려사』를 읽는 도중에도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고려 개국 태조 왕건이 박술희에게 훈요(訓要)를 내리며 말한 부분이다. 

 

북한 『고려사』

 

"우리 동방은 오래 전부터 중국 풍습을 본받아 문물 례악 제도를 다 그대로 준수하여 왔다." 

 

대한민국 『고려사』

 

"우리 동방(東方)은 옛날부터 중국의 풍속[唐風]을 흠모하여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이 다 그 제도를 따랐.."

 

이 해석의 '중국' 부분은 북한도 한국도 모두 잘 못 하고 있다. 원문을 보니 '中國風'이 아니었고 '唐風'이었다. '중국'이 아니라 '당(唐) 나라'였던 것이다.

 

현대사에 기준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관점에서는 '중국'은 한족의 중원 국가라고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당(唐) 나라는 선비족이 중원을 지배한 왕조다. 

 

따라서 당(唐)을 중국으로 대충 불러 버리면 우리는 당시 중원 문명의 중심 세력을 한족으로 잡게 되는 자연스러운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까지 비약할 필요는 없다 해도 당(唐)을 당(唐)이라 부르지 않는 것부터 고쳐야 한다. 

 

나의 생각,   주제와는 별개이지만 왕건이 '오래전부터'이라는 용어를 쓴 사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다. 왕건이 말한 '오래 전'은 사실 고조선이라든지 삼한, 부여, 고구려 시절까지 다 아울러 말한 것이 아니고, 다만 왕건이 생존하던 시절의 역사적 배경에 국한한 편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가 활발한 국제 무역을 하고 강성했던 군사력으로 영토를 넓힌 약 2백 년 후인 877년에 태어난 왕건에게는 일생이 귀속된 시대가 신라와 당나라 시대였다. 더욱이 쇠퇴해 가는 신라 말기에 태어난 왕건으로써는 중원의 문물을 받아 들여오던 세태에 기반하여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역시도 조선 초기에 고려사를 편찬하는 데에 참여한 세 정 씨들이 명에 대한 사대 사관을 관철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면 말이다.  


 

또 다른 예로 충선왕이 한 말에도 '중국'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북한 『고려사』

 

"진(秦) 한(漢)의 옛 중국 강토를 평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대한민국 『고려사』

 

"진한(秦漢)의 강역(疆域)을 평정하고자 할 뿐이었다."

 

이 부분도 역시 원문에는 '진한의 강토' ('秦漢之彊')라고만 되어 있을 뿐 중국(中國)이라는 말은 없었다. 물론 대한민국 『고려사』는 '진한'이라고 쓰여 있다. 이 부분은 원문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 『고려사』

 

"충선왕은 총명하고 옛력사를 좋아하였는바 중국의 박아(博雅)한 선비들로써 왕구(王構)·염복(閻復)·요수(姚燧)·소석(蕭奭)·조맹부(趙孟頫)·우집(虞集) 등과 같은 사람들이 다 그와 교제하였다."

 

대한민국 『고려사』

 

"충선왕은 총명하고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왕구(王構)·염복(閻復)·요수(姚燧)·소석(蕭奭)·조맹부(趙孟頫)·우집(虞集)과 같이 박학(博學)하고 점잖은 중원(中原)의 선비들이 모두 그 문하(門下)에서 노닐었으니"

 

북한 『고려사』는 '중국'이라고 하고 대한민국 『고려사』는 '중원'이라고 쓰여 있다. 이 경우 원문은 '중원의 박아한 선비들'(中原博雅之士)이라고 쓰여 있다. 

 


 

이후로도 계속 이런 예가 이어지고 있다. 

 

북한 역시 '중'과 '중국'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고 또한 중국이 아닌 예컨대 '당(唐)'의 경우에도 '중국'이라고 대충 부르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현 중국 영토를 점거 중인 중공의 정치적 영토와 역사적 영토 또 나아가 민족 구분을 엄밀히 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이 평화와 협력으로 이어지는 현시점에 이대로만 간다면 멀잖아 남북이 서로 역사 관점 문제를 정리해야 할 시기가 오리라는 것은 예측할 수 있다. 그때 이러한 중원 국가에 대한 우리의 관점 과 

'중국'

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하여도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새로이 생산되는 문헌에 사용할 용어 표준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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