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나의 철학, 영혼, 생명

시물라시옹과 존재의 매타적 현실 그리고 불변하는 것

by SacredCrow 2023. 9. 23.
300x250

생명이 있는 신비한 개미를 분해해보면 그 안에는 내가 상상하던 그 생명의 신묘함에 관한 환상과 유사한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몸은 고깃덩이를 보여줄 뿐. 생명은 그 고깃덩이가 조성한 놀이동산에서 추는 춤과 같다. 

나는 고깃덩이의 현실에서 환멸을 느낀다. 내가 알던 것은 그 내재적인 기능들의 조합이며 그 조합의 지속 가능한 상태였던 것이고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형태와 양상을 가진다. 

 

이상할 정도로 기이하게도 맥락이 없이 그렇게 도약하고 만다. 그러나 생명에 관한 나의 상상은 호르몬의 작용에 의해서 더욱더 윤색되고 아름다워진다. 

이러한 현실은 인간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에 비슷한 방법으로 적용되고 있다. 생명, 이미지, 비디오, 행복, 섹스, 정치, 매스미디어, 대중문화, 학문 그 모든 것이 내가 조성한 이상적인 표상 아래에서 존재하지만 그것들의 실상은 어떤가? 

 

다시말해서 그것이 그것다운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조성한 사실 중 일부 단면을 보고 있다. 

이미지와 비디오는 이미지나 비디오답지 않은 자성체의 조합으로 기억되고 자성을 이진수로 해석하여 그 배열에 따라 그림을 재현하는 프로토콜(규약)이 정해진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행복은 행복 그 자체로 존재하다가 나타나지 않고 그것과 전혀 비슷해보이지도 않는 생화학적 작용물인 호르몬과 감각기관에 의해 촉발되는 현상이며, 섹스는 도파민과 황홀한 환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고깃덩이의 마찰이다. 

정치는 이상과 당위와 사실로 구성된 함수로써 그 실제 구동은 정말로 추악한 거래와 초라하고 거칠고 무례한 활동대원들에 의해서 추진된다. 어떻게 보면 심지어 민주주의는 점조직의 우상화와 파시즘적 방법으로 유지된다. 이 역시 표상(表象)과 실제의 괴리감을 가져온다.

매스미디어는 형상을 흉내내고 정보를 흉내내어 우리의 감각을 충족할 뿐. 실제로는 전파나 인터넷 이진수 신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는 감각정보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있는 형태로 변조가 가능한 질료 형태의 정보로 전송된다. 

 

그 전파나 이진수의 입장에서 그것들은 인간의 입장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인간이 그것들을 어떤 방법으로 받아 들이기로 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의 기억이나 영혼도 이러한 변조된 질료로 우리의 마음과 생명에 관여하고 있어서 마치 접혀진 세계처럼 우리의 시각에서 감춰져 있을 것이다.

대중문화는 그 대중문화를 기획하고 사람들이 즐길 방향을 제시한 틀거리 내에서 우리를 가두는 작업을 성공할 때에 비로서 그 확장과 대중성은 지속 가능하다. 대중성은 그냥 순수한 대중성 그자체로써 이뤄진 것이 아니라, 기획되고 약속된 프로토콜에 따라 대중을 적응시킨 결과인 것이다. 

학문은 수많은 차원의 추상 속에서 단면을 보며 판단하는 장님 코기리 만지기이고 언제나 확증 편향의 길로 빠질 위기에 있다. 따라서 학문으로 우리가 도달했다고 믿고 있는 계몽은 정작 우리를 더 큰 무지로 빠트리게 한다.

 

이 계몽 되었다는 믿음은 우리를 더 돌아이로 만들어서 계몽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더 무지해진다. 

교육은 아이들을 병아리 솎아 내기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육 당국이 선별하는 기준에 맞는 학생만을 선별하는 소세지 만들기 기계와 같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의 입시 중심 교육은 '계층 인종주의'를 조장한다. 이것은 인간의 성장을 돕는게 아니라 인종주의와 패배에 적응시키는 과정이다.

소세지를 만들기에 적함한 연한 육질만을 선별한다. 교육은 인간의 다양성과 존귀함과 재능 및 개성을 발현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소세지용 인간만을 선별한다.  

 

현실은 환상을 구현하기 위해 작동하는 도구이고 환상은 현실에 적응하여 살기 위한 도구이다. 이 두가지 사건이 늘 우리의 의식 앞에서 혹은 뒤에서 끝 없이 일어난다. 


이상과 같이 우리가 인식하는 것들은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별도의 과정으로써 존재한다. 그 세계는 접혀져 있어서 보통은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가려져 있다.

우리는 일종의 매타적 환상을 영위하고 있다. 그리고 그 환상을 떠받들고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모든 기계적인 조화가 이 세계의 실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인간은 환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방황하거나 망각한다. 

 

환상을 영위 하는 인간은 환상 위에서 인식의 주체가 된듯이 착각하는 존재이고, 기계적 과정으로 설명되어지는 인간은 원인 모르게 세계에 던져진 채로 (기투(企投)) 기계적 과정을 지속하고 있는데, 인간은 의식에서 인지되지 않는 활동을 하는 무의식에 의해서 세계가 형성되고 있는 과정과 접하고 있다. 

 

매타성은 바로 이 환상의 주체가 기계적 과정을 인지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그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728x90


감정, 불안, 화내고, 어리석고, 탐하고, 시샘하는 마음은 그활동의 누빔점과 같은 점조직 의욕 증폭장치이며 동시에 스트레스를 소리로 발사해서 해소하는 악기와 같다. 

지성 역시 매타적 환상의 일종이다. 우리는 고깃덩이의 기계적 현실 위에서 정보를 습득하고 보유한다. 그런데 그 정보를 내가 알고 있다는 자각은 무엇에 의해서 보증이 되는가? 여기서 매타성이 개입하여 정보의 진위 여부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면밀한 논리적 검토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런다고 해도 우리는 곧 망각하고 의욕마저 망각할 수 있다. 몸 기계는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우리가 너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도록 한다. 

 

그 정보는 때론 내부에서 불협화음을 일으켜 스트레스로 작용하기에 생존에 불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망각이라는 기능에 의해서 자동으로 무의식으로 분할 잠식시키듯이 기억을 점점 제거해 나가는 몸의 작용을 겪는다. 

그런식으로 우리는 영혼의 현실이다. 전생의 기억이나 영적 깨달음 마저 망각하게 된다. 생존에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이 있는 한 이것은 중생성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생존을 위해서 활동하는 것이 몸의 가장 원초적인 존재 이유이고 지상 과제이다.

몸은 세포를 죽임으로써 새세포를 만든다. 그러니까 몸은 생존을 위해서 생존을 더 지속가능하게 하는 살생을 한다. 우리 몸은 그런 활동을 쉬지 않고 하고 있다. 나의 세포는 계속 죽고 새로 생겨 난다. 

나의 정보 또한 계속 해서 죽는다. 그런 죽임으로써 나의 의식은 생존한다. 무의식은 의식을 살리기 위한 죽음과 모든 가능성으로 가득한 암실이다. 존재는 시물라시옹이며 매타적이고 생명을 위해서 죽음을 작업하는 변증법이다. 

 

삶과 죽음은 삻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하다. 삶은 늘 죽음 위에 서 있으며 우리는 삶권력의 그러한 다소 모순적인 활동 위에서 마음의 환상체와 정신 활동을 유지할 수 있다. 

마음 역시 계속해서 정보를 죽이며 정보를 받아들이고 정화한다. 결국 모든 것이 변화하지만 오직 삶권력의 어김 없는 의지와 정신활동의 언어와 형상과 개념으로 이뤄진 환상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몸은 소모품인 것이며 몸이 사라지면 소모품의 삶권력은 완전히 죽음의 프로세스에 의해서 압도당하며 새로운 존재의 형태로 치환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