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모든 비참한 현실이 등장인물에 의해서 초래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자신의 현실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직감으로 알고 있다.
지옥도 천당도 모두 나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자 하는 현실이 곧 나의 현실이다.
우리는 자신의 감각만을 바라보고 있고 그로인해 다른 현실을 초래한다.
감각을 보고 있기에 현실의 실상과 괴리되는 이격이 있다.
철저하게 지성이나 진실의 관조자가 아니 그저 액터로써 피동적인 사물,
즉 현실로 기투된 존재이거나 행동 역할자의 수준에서 인물이 제한되어 있다.
그렇기에 더 사실적이다.
관객은 상황의 전개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기에 등장인물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고 스크린으로 빨려들어가
등장인물이 놓인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현실에 등장인물처럼 놓이게 된다.
이 영화는 관객을 액터로 끌어당긴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가 심리 스릴러인 이유다.
우리가 두려워하면 두려워하게 되고 안도하면 안도하게 된다.
공포는 우리가 공포를 믿는 순간 공포를 능가하는 공포로 다가온다.
공포를 택하면 공포가 온다.
공포가 오면 공포가 느껴진다.
공포가 느껴지면 공포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공포를 인정하면 공포가 더 온다.
이 무한 반복에서 만큼은 구원이 불가능한 칠흙같은 어둠의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곡성은 무서웠다.
또, 곡성에는 줄거리가 명확히 없다.
그래서 줄거리를 추리해보려는 노력은 무의미 하다.
텅 빈 마음에 들어찬 것에 관한 의문과 그로인한 불안이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점이다.
줄거리는 시간 배열의 전후 관계이지만 곡성에는 시간이 없다.
영화의 모든 것은 처음부터 한꺼번에 모두 진열되어 있었다.
텅 빈 마음에 우리가 느끼고자 했던 공포의 표상이 들어찬 것이었다.
우리가 채운 것이 무엇이건 그것에서 우리의 마음이 세계를 재구성한다.
우리는 재구성된 세계에서 의지할 곳 없고 붙잡아 주는 통제자가 없이 떠도는
감정의 극단에 치우친 미아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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